2014년 3월 31일 월요일

마음을 담대하게 하자_조하리창


누군가와 말 하다가 상처받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딱 세가지 이유이다.
약점을 건드렸거나,,,, 몰라줬거나,,,, 오해했거나......
약점을 좀 건드리면 어떤가요? 사실인 걸... 조금 건드렸는데 왜 그렇게 난리일까요?
이럴 때에는 따지고 맺힐 것도 없이 그냥 인정하면 된다. 
내가 몰랐을 때는 그래 맞아 난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면되고
나를 오해했을 경우에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당신들이 나를  잘 모르고 있다고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
아래의 조하리의 창 이론에 비추어 내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좀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조하리 창(JW;Joharry Window) 이용하기
Joseph Luft와 Harry Ingham의 조하리 창( Joseph & Harry = Johari)은 우리가 어떻게 정보를 주고 받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JW는 개인과 팀 사이 자아인식을 설명하고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비즈니스 맥락에서 집단의 역학관계(group dynamics)를 변화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조하리 창 모델은 때때로 "자아인식의 공개 /피드백(disclosure/feedback) 모델" 또는 "정보처리도구"로 불린다. 그것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정보를 대표한다: 다음의 4가지 관점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과 관련된 개인의 느낌, 경험, 관점, 태도, 기술, 의도, 동기부여 등

1. 공개 영역 (Open area;Arena) : 자신에 관하여 스스로 알고 있는 것과 타인이 알고 있는 것. 사례: 자신의 이름, 머리 색깔, 자신이 개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사람은 노출과 피드백 요청(Exposure and Feedback Solicitation)을 증가시킴으로써 영역의 크기를 확대할 수 있으며 확대해야 한다. (도표 2)
2. 맹인 영역 (Blind Area;Blind Spot) : 자신에 관하여 자신은 모르지만 타인은 알고 있는 것. 사례: 자신의 매너, 자신에 관하여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
3. 비밀 영역 (Hidden Area;Facade) : 자신에 관하여 자신은 알고 있지만 타인은 모르고 있는 것. : 자신의 비밀, 희망, 욕망, 좋하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4. 미지 영역 (Unknown Area;The Unknown) : 자신에 관하여 자신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것. 이 정보는 JW의 나머지에 영향을 미칠 잠재성이 있는 하나의 미지수를 갖고 있다.



초기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당신이 누군가를 만날 때, 영역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약간의 시간과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어림짐작으로 보면 당신은 공개 영역(Open area)을 확대하여 우세한 창(dominant window)이 되도록 노력하여, 상호관계에서 투명성, 개방성, 정직성 등을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 아마 당신이 이렇게 할 경우,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개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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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하리의 창’

심리학자 조지프 루프트와 해리 잉햄은 개인의 마음을 4영역으로 나누어 ‘네 가지 창’이라 비유했다.

우선은 내가 아는 창, 그리고 내가 모르는 창이 있다.
그리고 남이 아는 창, 그리고 나도 남도 모르는 창으로 겹치거나 나누어진다.
이를 풀면 처음에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 ‘공감의 창(open area)’이라 한다.
두번째로 나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모르는 것이 ‘자각의 창(hidden area)’이라 한다.
세 번째는 ‘무지의 창(blind area)’이라하여 나는 모르는데 상대방이 아는 경우다. 
마지막은 나도 상대방도 모두 모르는 ‘미지의 창(unknown area)’이다. 이 학설은 각각의 창에 따라 나와 상대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보여준다.

1. 서로가 알고 있는내 마음의 ‘공감의 창’ 영역에선 칭찬이 지나치면 아부가 된다.
서로 뻔히 아는 내용을 반복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핀잔이 지나쳐도 독이 된다.
아픈 곳을 계속 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평온하다.

2.  ‘자각의 창’에선 오해가 발생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상대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영역에서 나에게 충고를 한다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3. 그러나 ‘무지의 창’에선 그 결과가 달라진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나의 장점과 단점을 상대가 지적해주면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 상대에겐 존경과 호감을 느낀다. 또 상대를 통해 나의 장점을 발견하게 되면
“내가 이 분야에서 능력이 있구나”라는 자기 확장의 느낌을 갖는다.

4. ‘미지의 창’에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개인의 콤플렉스 등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상대가 이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개개인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국 ‘조하리의 창’이 강조하는 영역은 ‘무지의 창’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줄 수 있는 영역이다.
상대의 장점을 살피려는 마음가짐이 의사소통의 열쇠인 셈이다.

그렇다고 상대의 호감을 사기위해 ‘무지의 창’을 조금이라도 억지로 열려고 해선 안 된다.
그 창이 ‘미지의 창’이거나 혹은 ‘숨겨진 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억지가 동원되면 화를 부를 수 있다. 상대를 바꾸려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기에 그렇다.
설령 자녀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바꾸기가 힘든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인 것이다.

최고의 ‘마음의 창’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마음의 창을 키우는 기회를 가져라~

2014년 3월 30일 일요일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Wake[HillSong] 느낌?


[Verse 1]
At break of day, in hope we rise 하루에 동이 틀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일어나지요
We speak Your name, we lift our eyes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눈을 떠요
Tune our hearts into Your beat 우리의 심장을 당신의 박동에 맞추고
Where we walk, there You'll be 우리가 걷는 곳에 언제나 당신이 있지요

[Verse 2]
With fire in our eyes, our lives alight *우리의 눈에 있는 불꽃으로 우리의 삶이 불붙듯이 빛나요
Your love untamed, it's blazing out **억누를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이 불꽃처럼 빠르게 움직이죠
The streets will glow forever bright 길거리들는 영원히 밝게 빛날 거에요
Your glory's breaking through the night 당신의 영광은 어두운 밤을 뚫고 나오지요

[PreChorus]
You will never fade away, Your love is here to stay 당신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의 사랑은 여기 머물고 계시죠
By my side, in my life, shining through me everyday 내 곁에, 내 삶에, 매일 나를 비춰줘요
You will never fade away, Your love is here to stay 당신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의 사랑은 여기 머물고 계시죠
By my side, in my life, shining through me everyday 내 곁에, 내 삶에, 매일 나를 비춰줘요


[Chorus]
You wake within me, wake within me 당신은 내 안에서 깨어나지요
You're in my heart forever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계시죠
You wake within me, wake within me 당신은 내 안에서 깨어나지요
You're in my heart forever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계시죠

[Bridge]
Forever, forever, forever in Your love 영원히 당신의 사랑 안에
Forever, forever, forever in Your love 영원히 당신의 사랑 안에
Forever, forever, forever in Your love 영원히 당신의 사랑 안에
Forever, forever, we know that...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알지요...

2014년 3월 5일 수요일

부림절에 대하여

부림절

에 9:20-32 (구 759찬송254장 (186)


오늘 본문은 사실 에스더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더서가 기록하고자 했던
그래서 후대의 성도들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내용의 결론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 백성들이 지키는 또 하나의 절기인 부림절의 등장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부림절이 그들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내용입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끝까지 유대인들을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나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더 할 나위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유대인들의 입장과 처지를 위해서는 
누구라도 다 멸망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경고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무턱대고 부림절을 좋아할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에스더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에스더서는 성경 66권 중에서 필요 없는 책이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평가를 한다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심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비록 그 내용상의 전개에 있어서 유대인 우선의 불공평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의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받은 은혜가 그들의 실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칫 에스더가 결심한 죽으면 죽으리이다.”로 빠질 가능성이 다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남과는 다른 거창한 결심을 하는 신앙인이 되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의 유대인들이 크게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죽을 것을 각오한 신앙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앞뒤 다 자르고 그냥 유대인이 누린 잔인한 성공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들의 성공은 사실 어떤 성격입니까
단순히 자기들의 실력으로 누린 성공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의 모든 계획보다 앞서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하나님은 저들의 모든 영역에서 빠져 있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실력으로 이긴 기쁨만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기가 막히게 역사하신 것인데 
정작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든 분위기가 다 그렇습니다.

23절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26-27절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패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그냥 몽땅 다 자기들이 임의로 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하면서 그 어디에도 감사하다고 하는 은혜로운 표현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사람들에게 부림절을 기념하게 한다고 하는 인간적인 의지의 표현만 있습니다
그러니 여태 하만의 흉계를 벗어나서 자신들이 살게 되고
또 자신들을 미워했던 자들을 죽인 것이 다 자기들의 실력입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왕후 에스더와 그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공로입니다
누가 에스더를 바사의 왕후에 오르게 하셨는지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통찰이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의 바로 이런 면이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이스라엘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대포의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안의 의로 가득한 성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는데 마음으로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그런 성도들입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섬김이나 베품이나 나눔의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꼭 그 행세와 함께 있습니다
자기가 한 만큼의 생색이 부록처럼 따라 다닙니다
그런 분들의 모습에는 진정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유대인의 기념일인 부림절도 그렇습니다
나눔과 섬김이 없습니다
물론 말로는 있습니다.

22절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고 마지막에 써놓았지만 
사실 에스더 전체로 볼 때는 어딘지 모르는 부조화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다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니까 
그냥 구색 맞추려고 끼워 넣은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생색을 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을 위한 희생과 섬김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사는 것은 지극 당연하다고 보겠습니다
조금씩 자제를 해야만 합니다
잔뜩 들어간 어깨 힘을 조금은 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승리감에만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진솔하고 풍성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누려야만 할 것입니다.
자기 잘난 맛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하루를 선택해서 기념하는 삶이 아니라 
일 년 365 일을 계속해서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