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절
에 9:20-32 (구 759쪽) 찬송254장 (통186장)
오늘 본문은 사실 에스더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더서가 기록하고자 했던,
그래서 후대의 성도들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내용의 결론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 백성들이 지키는 또 하나의 절기인 부림절의 등장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부림절이 그들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내용입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끝까지 유대인들을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나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더 할 나위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유대인들의 입장과 처지를 위해서는
누구라도 다 멸망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경고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무턱대고 부림절을 좋아할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에스더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에스더서는 성경 66권 중에서 필요 없는 책이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평가를 한다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심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비록 그 내용상의 전개에 있어서 유대인 우선의 불공평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의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받은 은혜가 그들의 실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칫 에스더가 결심한 “죽으면 죽으리이다.”로 빠질 가능성이 다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남과는 다른 거창한 결심을 하는 신앙인이 되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의 유대인들이 크게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죽을 것을 각오한 신앙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앞뒤 다 자르고 그냥 유대인이 누린 잔인한 성공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들의 성공은 사실 어떤 성격입니까?
단순히 자기들의 실력으로 누린 성공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의 모든 계획보다 앞서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하나님은 저들의 모든 영역에서 빠져 있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실력으로 이긴 기쁨만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기가 막히게 역사하신 것인데
정작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든 분위기가 다 그렇습니다.
23절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26-27절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패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그냥 몽땅 다 자기들이 임의로 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하면서 그 어디에도 감사하다고 하는 은혜로운 표현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사람들에게 부림절을 기념하게 한다고 하는 인간적인 의지의 표현만 있습니다.
그러니 여태 하만의 흉계를 벗어나서 자신들이 살게 되고,
또 자신들을 미워했던 자들을 죽인 것이 다 자기들의 실력입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왕후 에스더와 그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공로입니다.
누가 에스더를 바사의 왕후에 오르게 하셨는지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통찰이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의 바로 이런 면이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이스라엘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대포의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안의 의로 가득한 성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는데 마음으로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그런 성도들입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섬김이나 베품이나 나눔의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꼭 그 행세와 함께 있습니다.
자기가 한 만큼의 생색이 부록처럼 따라 다닙니다.
그런 분들의 모습에는 진정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유대인의 기념일인 부림절도 그렇습니다.
나눔과 섬김이 없습니다.
물론 말로는 있습니다.
22절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고 마지막에 써놓았지만
사실 에스더 전체로 볼 때는 어딘지 모르는 부조화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다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니까
그냥 구색 맞추려고 끼워 넣은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생색을 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을 위한 희생과 섬김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사는 것은 지극 당연하다고 보겠습니다.
조금씩 자제를 해야만 합니다.
잔뜩 들어간 어깨 힘을 조금은 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승리감에만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진솔하고 풍성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누려야만 할 것입니다.
자기 잘난 맛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하루를 선택해서 기념하는 삶이 아니라
일 년 365 일을 계속해서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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