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마6:21-23절)
요즘 노후에 얼마를 가져야 할까 계산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저도 신문에 나는 기사를 읽으며 이거 큰일이네 하고 깜빡할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간(안드르포스-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직립동물)이 짐승과에 속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고 땅에만 정신을 팔도록 합니다. 가인의 문명이며 사단의 가치문화입니다. 인간의 가치관이 인생관이 되고 그 인생관이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인생 곧 살림살이에 눈이 보배입니다. 하늘의 보화를 보는 눈이 바로 보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일곱 영 곧 완전한 영이신 성령에 의한 일곱 눈(계5:6)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결국 안다는 말인데 말씀을 듣고 보고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시며 나를 끌어안고 건너가신 십자가의 대속의 과정이 보이세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 안에 감추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계세요? 스테판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껴안으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바꾸어 아버지의 영광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 보이세요?(고후3:18) 그 영광이 마음속에 비취는 것이 보이세요? 그 영광을 보니...(요1:14) 그 하늘의 보화가 보이느냐구요? 알듯 말듯 하시면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듣고 더 듣고 인내로 그 말씀을 속에서 더 숙성을 시키세요.
어느 날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해 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생각나게 하심과 가르치심과 탄식하는 잔소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아버지의 영광에 도전하는 자신으로 진화가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진화입니다. 이게 곧 아버지의 계획이며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눈은 죄인인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소경이라고 합니까 맹인이라고 부릅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기 관점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신학의 관점, 교회의 관점, 교단의 관점을 줄줄 뀁니다. 그 자리에서 반려견이라도 붙여 줘야 할 지경입니다.
왜 기독교가 극단일까요? 죄인인 인간과 최상극의 끝인 하나님 아버지와 그 영광을 함께 보고 있으니 극단일 수밖에... 내가 보고 있는 사실을 어찌 보지 못한다 하리요. 거기에 이르게 하신 선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의 일하심을 내가 보고 있는데 독선이 아니면 내가 가짜겠지요. 당연히 우리의 가치의 눈은 하늘의 보물과 그 가는 길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가리려는 사단의 도발이 환경과 사람들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발발합니다. 또한 이를 보지 못한 소경 곧 맹인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납니다. 안 보이는 사람이야 제멋대로 지껄이면 되지만 하늘의 보화를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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